난 사실 멋내는 게 좋아
질긴 낙천성과 온기
2014.11.27

그런데 도대체 왜 인간은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걸까? 중년이 되어도 갈피를 못 잡는다고 입만 열면 한탄하다가도 어째서 내가 아는 진실을 모르는 듯 보이는 타인을 만나면 아는 바를 전수하지 못해 안달하는 걸까? 냉정한 답은 “잘난 척하고 싶어서”다. 착한 대답은? “그저 마음이 쓰여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후자의 현상에 오래전부터 매료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브하다고 콧방귀 뀔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세계관일 수 있다. <보이후드>의 후반에는 심리학 교수가 된 올리비아의 강의가 잠깐 나온다. 그녀는 맹수와 맞닥뜨린 어머니와 아기의 사례를 들어 자기보존 욕구보다 사랑이 인류의 생존력을 높인다는 가설을 설명한다. 내가 링클레이터 영화에 흔들리는 까닭도 숱한 영화에서 마주치는 손쉬운 센티멘털리즘(감독 자신도 믿지 않는)과는 구분되는 질긴 낙천성과 온기에 있다. (...)


맬릭은 안으로 독백하고 링클레이터는 밖으로 수다를 떤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유미주의가 방어하는 자리에 링클레이터의 박애주의가 있다. 나는 네 감독의 영화를 골고루 사랑한다. 그들은 모두, 오염되지 않은 소년의 시야를 필사적으로 수호하려 한다. 그런데 신이 그중 딱 한 감독의 영화 속으로 직접 입장할 기회를 주겠으니 고르라 한다면 내 선택은 아마 링클레이터일 것이다. 거기 포함되는 순간 내 삶이 더 복되고 나아질 거라는 잇속 궁리 때문이다. <슬래커>와 <멍하고 혼돈스러운>,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를 보며 내가 느낀 떨림의 일부는 분명, 저 따스하고 현명한 소우주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링클레이터가 나를 찍어준다면 ‘삶’이라는 한 음절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흩어지기만 하는 시간이, 총체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어지러운 난반사의 소용돌이가 멈추고, 내 인생이 타인의 삶과 어떻게 기대어 힘을 주고받으며 스스로를 조각해가고 있는지 해명되지 않을까? 타르코프스키가 쓴 대로다. 우리가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삶이 불완전해서다. 


김혜리,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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