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실 멋내는 게 좋아
여름
2015.01.22
선배를 만난 건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그때 나는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나쁜 공기, 너무 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물론 교정의 초목과 잘 식은 봄밤 공기는 가슴을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자기방어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의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해롱댈 수는 없는 일이다. 번식기의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 싱싱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맘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었단 사실을 알리고픈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안 기어들어가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거기, 어두운 인문학관 통로에 선배가 있었다. 복도 끝 굽이진 곳에 길고 흐린 실루엣으로. 화장실에 들른 건지 사물함을 확인하러 온 건지는 몰랐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