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9
작가 선언. 떨리고 무서웠다. 미란다 원칙을 숙지하고 나간 게 무색해지게 경찰은 우리한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조용히 끝내고, 술을 마시러 갔다. 사람들의 얼굴은 다양하고도 복잡했다. 근 일주일간 밤새 총대 메고 일한 사람들은 피로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뿌듯함을,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전보다 커진 괴로움을 안고 아무도 때리지 않고 방패를 들이밀지도 않는 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때는 이런 거 하면 1차 갈 생각도 감히 못했는데 너희는 2차까지 가다니 진짜 신기하다, 고 했다. 예전 같으면 되게 싫었을 텐데 그냥 들었다. 듣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예술가들도 있었다. 나처럼 그냥 작가가 직업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예술에 대한 냉소가 습관이 된 내 마음으로도 예술가라고 부르고 존중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그들이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며 낮은 목소리로 '시인과 촌장'의 노래들을 함께 부르는데 잠시 질투가 느껴졌다. 난 순결한 문학이 어쩌고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 하는 말은 하나도 믿지 않지만 그 순간만은 그들의 얼굴이 몹시 예뻐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 순간의 풍경만큼은, 같은 문장을 읽는 사람들의 목소리라 쩌렁쩌렁 강당을 울리던 순간과 똑같이, 소름이 돋을 만한 것이었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몸에 무언가가 배서, 몸이 그걸 기억해서, 입에서 저절로 같은 소리가 나오다니. 그런 경험의 공유가 있다니 얼마나 부러운가.
따지고 보면 나도 누군가와 마주보며 서태지나 너바나나 블러나 패닉의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이렇구나, 나는 이런데, 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끔찍한 일들에 문을 닫아건 채 골방에서 혼자 썩어 죽어가는 날들이 지겨워 미치기 직전일 뿐이었다. 근데 자리에 있던 76년생 글쟁이가 뽕짝 분위기로 끌고 가버렸다. 야이 같은 76년생인데 왜 뽕짝이냐. 제발 좀 멋있게 놀자고 다음에 보면 말해봐야겠다.
다만 그렇게, 전에는 모르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2009. 7. 24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솔직함. 투명함. 남김없이 드러내기. 아무리 무의미하고 추하고 가볍고 사람을 찔러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천박해 보인다 해도 나는 인간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내뱉는 모든 말, 모든 행동의 까끌까끌한 부스러기가 진실에 가장 가까운 요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난 착한 어른보다는 언제나 발랄하고 반항적인 미친년, 미친놈이 좋았고 인간들의 바보스럽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들과 냉소에 깊이 매료되곤 했다.
이제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선함에 이르기 위한, 가공과 양념을 거친 그 부질없는 노력들은, 부서져가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부정태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긍정태를 만들어보려고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혼자 앓는 사람들의 노력이 값져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두 번 세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 세계의 겹쳐진 빛깔에 대해.
2010. 5. 12
속물과 동물 모두 인간이라는 말로 좀 따습게 끌어안아주면 안 되나. 그래야 나 같은 동물 혹은 속물도 인간이 되려고 하지.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인간이잖아. 온전히 속물이거나 온전히 동물이기만 한 존재는 이 사회에 없을 텐데. 인간이라고 누군가가 불러줘야 인간이 되는 이 많은 사람들을 칼로 베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터팬>의 요정처럼 박수를 쳐줘야 존재할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닐까.
윤이형, 문학동네 201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