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실 멋내는 게 좋아
자기만의 방
2016.07.15

키츠, 플로베르, 칼라일 같은 작가들은 특히 창조력이 왕성한 젊은 시절에 온갖 형태의 산만한 주변과 낙담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저주의 말과 고통의 비명이 자기분석적인 책과 고백록과 같은 저 책들에서 들려 옵니다. "위대한 시인들의 비참한 죽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시에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어떤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구상되는 시점에서부터 완전하고 결함 없이 태어난 책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빈 서가를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어려움이 극도로 더 심했을 것이라고요. 첫 번째로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19세기 초까지도 부모가 몇 안 되는 부자이거나 매우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용한 방이나 방음이 잘 되는 방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아버지가 인심 쓰듯 주는 여성의 용돈이란 필요한 옷을 사입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 같은 가난한 남자들조차도 누릴 수 있었던 도보 여행, 짧은 프랑스 여행, 매우 초라할지언정 가족의 요구나 횡포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독립된 숙소와 같은 진정제가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더욱 어려웠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환경이었지요. 키츠나 플로베르, 다른 재능 많은 남자들이 견디기 어려워했던 세상의 무관심은 여자의 경우에는 무관심을 넘어서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하듯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써라. 나는 상관없다. 세상은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고? 네가 쓴 글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 

"가난한 시인에게는 근래에도 또한 지난 200년 동안에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시인이나 아테네 노예의 자식이나 위대한 글을 낳는 바탕인 지적 사유의 세계를 맞이할 희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를바가 없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단지 지난 200년 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러했습니다. 여성은 지적 자유가 아테네 노예의 자식보다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시를 쓸 기회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강조한 이유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yunicorn